잡다한 이야기

풍천임씨 족보(豊川任氏族譜)

HaulS 2023. 10. 15.

풍천임씨 14세 문정공 죽애(竹崖) 임열(諱 任說) 초상(肖像)

임열 신도비(任說神道碑) 이식(李植) 찬(撰)
  
위 치 : 하남시 초일동 산2번지

연 대 : 숙종 33년(1707)

크 기 : 전체 높이 319cm, 비신 188cm, 폭 69cm, 두께 39cm

찬 서 전 : 이식 찬, 임수적 서, 정 전

<原文>
  

正憲大夫漢城府判尹諡文靖任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正憲大夫漢城府判尹兼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文靖
任公神道碑銘幷序
資憲大夫吏曺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右賓客
  
李植撰

明義大夫花春君兼五衛都摠府副摠管珽篆

六代孫進士守迪謹書

故判漢城府尹竹崖任公以文學耆德肯仕 四朝其流風遺韻人到于今稱之而植外王父東里尹公玉與公爲莫欄交雖年位差次而行止險夷實相契合故植自幼習知公名行有深於世之知者今公之諸孫錄公遺事屬植爲文將以揭諸墓兆此植於義所不得辭者也謹按公諱說字君遇任氏本中國人麗末有以公主從官來仕者肇籍于豊川府世有名位大將軍澍西河府院君子松豊山君德儒及我 朝參知政事球最顯球生成均生員諱復生贈通禮院通禮寔公高祖也曾祖敎授諱長孫贈左承旨祖成均生員諱濟 贈吏曹參判考南部參奉諱明弼 贈吏曹判書皆以公貴 恩例也驢海平尹氏僉正諱萱之女以正德庚午二月二日生公嘉靖辛卯中生員進士癸巳別試登文科初選承文院正字薦入史官丙申以弘文館修撰中重試第二戊戌以吏曹佐郞中擢英試第二半紀之內三捷巍科 國朝所未曾有文望爀然選 賜暇湖堂 敡三司以直提學擢承政院承旨轉爲大司諫吏曹兵曹參議陞嘉善拜慶尙道觀察使入爲司憲府大司憲禮曹參判又出爲平安道觀察使興滯率怠聲績茂著廟堂服其能迷還未久特薦再任入爲漢城府左右尹兼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都摠府副摠管陞爲判尹都摠管或迷或仍不離漢府者三十餘年參耆英會萬曆辛卯五月八日卒壽八十二公初以文華致位而能恪勤供職所磊有聲立 朝六十年始終一卽中更權奸士禍而未嘗詭隨枉己亦無紘激犯患公論之歸重久矣逮在 明宣兩朝間士論一變務爲激揚舊臣前輩畏避彈剌多輪比新進以下士禮賢爲名風習頓異而公與二三朋輩穆然守靜密以書史自娛雖數被絲牡而推分任眞不形於色辭以此見排於世議特以藻鑑公明爲館學所齊仰 朝廷亦推轂讓先故屢掌試本其所拔取皆有名特達稱爲得人最盛栗谷先生在銓席嘗慨嘆曰彼任某亦有何累而久不見用耶遂注擬正卿自此重尨時論俄以工曹判書被劾不拜栗谷娩也公居家有範事親以誠朝夕必與夫人躬磊進饌親歿而事實姊甚處朝退必候其家先世饒於庄業夫人經紀不匱公嫌其嬴不問有無平生請託不及私幹手錄親戚疾病婚喪鮮給必徧分施俸祿必先貧族惟務慤實不事矜餙故世亦莫之知也博學强記爲詩文專常氣格其考試先與同席拔奇汰冗更自閱落卷見有枉屈則升之百不失一其綜事勤敏多類此世謂公行義政事不及文學者豈其然乎豈其然乎配貞夫人全義李氏諱漢之女有二男四女男長崇老察訪次榮老文科壯元又擢重試官至宗簿寺正女長嫁府使南宮悌次縣監李浚次郡守申鴻漸次宗室興寧君秀殺崇老子奇監役官早歿榮老四子三女奕縣令敏文科承旨章文科吏曹正郞濱別坐妾出二子袞立女淚長進士李穆次尹應聘次李承尹外孫七人荇蓂藼英南宮氏子承旨德洙李氏繼子濩申氏繼子豊海君浩興寧君子曾孫男十一人奇生叔英文行高世官終持平次世英奕生震伯生員敏生俊伯經歷次義伯佐郞章生善伯文科縣監次康伯次衡伯次翰伯進士濱生慶伯次繼伯叔英早終無後以俊伯子至爲後又夭善伯子重文科注書內外曾玄甚盛令不盡載公有遺集十數卷幷家藏文籍佚於兵火歷官年紀亦不能詳惜哉墓在廣州治北庭坪負艮之原夫人欖焉銘曰人文之會英俊所興孰不思奮先人以登 公在自試衿佩讓能 及以試人搢紳讓明 胡卒不試旣摯而傾 人謂公屈公惟履平 我論其世寔德之行 載昌瘟後載揚瘟聲 是謂不亡奚事斯銘
  

澤堂公此文成於崇禎庚辰而遷就未勤石至今六十八年玄孫記牧原城五代孫舜元按關東遂與之合謀營府損俸幷力伐石遜刻以樹焉碑序中子孫科甲職名蕎後生而未及書者玆敢追記如左曾孫以後不錄外裔澤老旣已起例謹從之曾孫叔英文科修撰義伯文科參判善伯文科通政府使翰伯文科壯元校理玄孫二十八人叔英繼子至無子而夭 又以量爲嗣世英子是傳俊伯子奎文科監司至攪僉知釐壆 義伯子座文科正記文科牧使陞董進士善伯子重文科持平量蔿堂文科判決事康伯繼子 衡伯子在縣監基 墅妾子全嘉善翰伯子譽進士 堥慶伯子塾堡壁繼伯繼子壁五代孫四十五人量子胤元文科大司諫舜元文科監司是傳子晉昌應昌奎子鎭元通政府使蔿子遂元履元海元會元釐子得元妾子最元震繼子載元座子調元記子鼎元健元行元陞子士元董子慶元重子相元文科壯元重試左參贊贊元奉事翊元文科兵曹佐郞堂子達元進士 子壽元萬元擧元柱元大元在子聖元命元斗元進士基繼子命元縣監墅子啓元興元學元譽繼子藎元 子藎元敬元普元蕁子始元塾子泰元智元信元孝元祐元載元堡子復元德元壁子世元六代孫多幼只錄若而人胤元子守迪進士舜元繼子守寬鎭元子由夏宗夏述調元子遭進士邈士元子選適逸相元子守幹文科重試校理守朝贊元子守經參奉守綸翊元繼子守朝進士達元子守憲守寬壽元子守約萬元子守恒守益聖元繼子守成命元子守謙守成守良守夏玄孫通政大夫行原州牧使知製 敎記謹識
  

崇禎紀元後八十年丁亥 十月 日立
  
 <번역문>

정헌대부 한성부판윤 시문정임공 신도비명

유명 조선국 정헌대부 한성부판윤 겸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시호 문정 임공 신도비명 병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우빈객 이식註 1107)이 글을 짓고, 명의대부 화춘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정은 전액(篆額)을 썼으며 6대손 진사 수적註 1108)이 삼가 글을 쓰다.

임열 신도비

돌아가신 한성부 부윤 죽애 임공은 문학과 덕망이 높은 원로로 4조 임금을 섬기면서 벼슬한 분이시다. 얼을 지금에 와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칭찬해마지 않는다. 나〔李植〕의 외할아버지 동리 윤공 옥께서 공과 교분이 막역한 사이라 비록 연령과 직위에 차이는 있지만행의 출처와 지기상합으로 나는 어려서부터 공의 명성과 덕행을 잘 알기에 온 세상에 밝히려 한다. 이제 공의 여러 손자들이 유사를 기록하여 찬문을 쓰는 내게 보이며 비문을 써 묘소 앞에 세우겠다고 하기에 나는 정분상 거절할 수 없어 삼가 간추려 쓴다.
  
공의 휘는 열, 자는 군우이신데 임씨는 본래 중국에서 왔다. 고려말 노국공주의 배종관으로 나와서(?)

풍천부에 적을 두고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다. 대장군 주, 서하부원군 자송, 풍산군 덕유 이 분들이

있으셨고, 조선조에 들어와 참지문화부 정사 구로부터 가장 현달하셨다.
 
구의 아들 복생은 성균 생원이며 증직으로 통례원의 통례이신데 곧 공의 고조이시다.
  
증조 교수공의 휘는 장손인데 증직으로 좌승지이시고 할아버지는 성균 생원으로 휘는 제인데 증직으로

이조참판이시며 아버님은 남부 참봉 희는 명필로 증직이 이조판서이셨다. 모두 공의 높은 벼슬로 인하여

나라에서 은전을 내렸다.
  
비(驢)는 해평 윤씨 첨정 훤(萱)의 따님이신데 정덕 경오년(1510) 2월 2일 생이시다.

가정(嘉靖) 신묘(1531)년 생원·진사에 합격, 계사년(1533) 별시문과에 합격하였고

승문원 정자로 사관에 선임되셨다.
  
병신년(1536) 홍문관 수찬으로 중시(重試) 차석으로 합격했다. 무술년(1538) 이조좌랑으로 영시(英試)에 합격했는데 역시 차석의 실력을 보였다. 불과 10년 미만에 세 번씩 대과에 급제하기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니 할 수 없다. 문학에 명망이 높은 까닭에 말미를 얻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하기도 했다. 삼사를 모두 거쳐 직제학에 오르고 승정원 승지로 발탁, 대사간으로 전보되어 이조· 병조 참의를 거쳐 가선(嘉善)에 승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후 사헌부에 전입되어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어 또 다시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뜻밖에도 정무에 태만하다는 지적의 무고를 당했다. 하지만 치적이 우수하여 조정의 공의는 이분을 체환하기로 하던 차 불시에 특선으로 한성부 좌우윤에 부임,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판윤 도총관으로 승진했다. 다소 교체하기는 했지만 항시 한성부에 30여 년간을 유임하며 기영회(耆英會)에 참여했다. 만력 5월 8일에 하세하셨는데 신묘년(1591) 향년 82세였다.

공은 당초 문장이 찬란했다. 관직에 나아가 정성을 다하고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명성이 일세에 높아 60년간 관로에 있으면서 시종여일하던 중 권간(權奸)들의 사화를 당하면서도 일찍이 꾀임에 빠져 몸을 더럽힌 적 없고 또한 불순한 태도로 윗사람에 거역하는일이 없다고 그전부터 공의로 받들어져 왔다. 옛날 명종·선조시대 사론이 어수선함에 따라 훈구대신들을 마구 공격한 일이 있었는데 어진이들은 이를 보다 못해 피해가기 일쑤였다. 그들의 탄핵과 기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 신진 사류들이 그러했다. 초야에 있는 선비를 높이고 어진 사람을 예우해야 한다고들 했지만, 풍습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때 공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조용히 한적한 곳에 가서 서책을 보며 자오(自娛)했다. 비록 그들로부터 자주 비방을 당했지만 분수라 생각하고 진실한 태도가 색사(色辭)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세의 논평에서 비판은 받았지만 특히 사람을 알아보는데 뛰어나 관학 유생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으며 조정에서도 역시 인재를 알아보는데 선견지명이 투철하고 남에게 양보성이 많다 하여 누차에 걸쳐 시험관으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당시 율곡(栗谷) 선생이 전형관으로 있을 때 항시 개탄하여 말했다. “임모(任某)는 무슨 연유로 오랫동안 등용하지 못하는가? 곧 정경(正卿)을 보필할 적임자 임에랴”하여, 이로부터 다시 시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공조판서의 탄핵으로 인하여 제수되지 못하였는데 아마도 율곡의 건의에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집에서 공은 법도가 있었으며 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조석으로 부인과 함께 진찬을 받들음이 극진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홀로 된 누님에게 더욱 존경하며 퇴조하면 즉시 그 집에 가서 문안을 드렸다. 선대에 농장이 풍요했는데 부인은 착실하게 그 살림을 보살폈다. 조금도 군색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공은 그 재산의 여하나 또한 유무도 묻는 적이 없었다. 평생 사사로운 일에는 일호도 청탁해 본적이 없었으며 친척간에 주소를 분명히 기록하고 우환이 있거나 혼상간에 큰일이 있으면 주급하기를 반드시 정에 맞게 하고 급여받은 것은 반드시 가난한 친척에게 우선 나누어 주되 정성이 담겨 있었고 가식이 전혀 없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로서는 역시 알아주는 이 없지 않았다.

널리 배우고 기억력이 뛰어나 시와 글을 쓰는데는 아담한 풍치가 그 격에 일치했다. 그가 고시관으로 있을 때 우성 동석한 처지로는 선출하기 복잡한 입장이 있으므로 다시 스스로 낙권된 두루말이를 검열하다가 억울한 점이 발견되면 다시 오르도록 주선해 주되 만의 하나라도 실수할까 염려했다. 모든 일에 진실하고 민감한 기풍이 이와 같으므로 사람들은 말했다. 공의 행의와 정사를 보면 문학에 비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 가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배위는 정부인 전의 이씨 휘 한(漢)의 따님인데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숭로로 찰방을 지내고 차남은 영로인데 문과 장원에 합격했으며 또 중시에 뽑혀 관직이 종부시정에 이르렀다. 장녀는 부사 남궁제에 출가하고 차녀는 현감 이준에게 출가했으며 3녀는 군수 신홍점에게 출가, 4녀는 종실 흥영군 수전에게 출가했다. 숭로의 아드님은 기로 감역관인데 일찍 별세했다. 영로는 4남 3녀를 두었다. 혁은 현령, 연은 문과로 승지, 장은 문과로 이조정랑, 적은 별좌가 되었다. 작은 집은 2남을 두었는데 곤·입이다. 따님의 장녀는 진사 이직, 차녀는 윤응빙, 3녀는 이승윤에 각각 출가하여 외손이 7명이다. 행·명·헌·영은 남궁씨의 소생이고 승지 덕수는 이씨의 양아드님이고 호는 신씨의 양아드님이며 풍해군 호는 흥영군의 아들이다. 증손이 11명이다.

기의 아드님 숙영은 문학과 덕행이 세상에 높으며 관직은 지평에 머물렀고 차남은 세영이다. 진백은 생원 혁의 소생이다. 연의 소생은 준백, 다음으로 의백은 좌랑이요, 장의 소생은 선백인데 문과로 현감, 다음은 강백, 다음은 형백, 다음은 한백이며, 진사 적의 소생은 경백, 다음은 계백이다. 숙영은 일찍이 돌아가 아들이 없어 준백의 아들 지를 양자하였으나 또 요절하였다. 선백의 아들 중은 문과로 주서이다. 내외 증현들이 많아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유집(遺集)으로 십여 권이 있다. 모두 집에 비장된 문적을 병화에 분실하여 관직의 연대 또한 상세히 밝히지 못하게 되어 참으로 가석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북방 정평 간좌인데 부인의 산소는 합장이다. 명에 쓴다.

문명사회에 영걸들은 많기도 하여라. 누구든 노력하였건만 선인으로 그 자리에 오른다 하랴. 공은 스스로 시험하였기에 금폐(衿佩)의 젊은 학자들로 어진이에 양보할 줄 알았던가. 그 마음으로 미루어 남을 시험하였기에 관원으로서 겸양하여 예의를 밝혔다. 어찌해 그 재능을 다 시험하지 못해 보고 그 지위에 가서 기울어지고 만단 말인가. 남들은 운이 없다 이르지만 공의 마음은 항시 태평하였어라. 내가 그 분의 일생을 논평한다면 다만 그 분의 덕행일 뿐이다. 그의 후손 크게 번창하고 그의 명성 드날림에 이것이 바로 그의 덕을 잊지 못함이어라. 어찌 무슨 공적을 비에 새기랴. 택당공의 이 글을 숭정 경진년(1640)에 작성하였지만 사정으로 인하여 빗돌에 새기지 못하고 지연된 지 어언 68년이나 되었다.

현손 방 원주목사 5대손 순원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다가 비로소 상의하여 돈도 마련하고 힘도합하여 비에 새겨 세운다. 이 비문이 작성 당시 자손의 과갑 직명과 뒤에 태어나서 미루어 기록하지 못한 분을 아래와 같이 수록하되 증손 이하 외손들은 생략한다.

일찍이 택당 이식집에서의 규례가 있었기에 이대로 쫓아간다. 증손 숙영은 문과로 수찬, 의백은 문과로 참판, 선백은 문과로 통정 부사, 한백은 문과로 장원 교리이며, 현손은 28명이다. 숙영은 지를 양자하였지만 아들이 없은 채 일찍 죽었고 또 양을 양자해서 후대를 이었다. 생부는 선백 세영의 아들 시전이다.

준백의 아들 규는 문과로 감사, 지·기는 첨지에 이르고 이·학·식·옥·영, 의백의 아들 좌는 문과로 목사에 올랐고 동은 진사, 선백의 아들 중은 문과로 지평, 양·전·당은 문과로 판결사를 지냈고 강백은 양자하였는데 돈이다. 형백의 아들로 재는 현감, 기·돈·서가 있다. 작은 집의 아들 전은 가선이고 한백의 아들로 후와 진사 추·무가 있다. 경백의 아들 숙·보·벽이다. 5대손은 45명이다. 양의 아들 윤원은 문과로 대사간이고 순원은 문과로 감사, 시전의 아들로 진원·응원이 있고 규의 아들 진원은 통정 부사요, 기의 아들 수원·이원·해원·회원이며 이의 아들은 득원이고 소가의 아들은 최원이며 학의 양자는 재원이다.

좌의 아들은 조원이요, 방의 아들은 정원·건원·행원이며 승의 아들 사원이고 동의 아들 경원·중의 아들은 상원인데 문과로 장원 중시를 보아 좌참찬이 되었다. 찬원은 봉사, 익원은 문과로 병조좌랑이고, 당의 아들 달원은 진사이며 돈의 아들로 수원·만원·거원·주원·대원이 있다. 재의 아들로 성원·명원·두원은 진사이고 기는 양자하였는데 명원은 현감이다. 서의 아들로 계원·홍원·학원이 있고 후의 아들은 양자하였는데 신원이고 추의 아들로 신원·경원·보원이 있고 무의 아들은 시원이며 숙의 아들로 태원·지원·신원·효원·우원·재원이 있고 보의 아들은 세원이며 벽의 아들은 복원·덕원이다. 6대손은 많지만 어리기에 몇 사람만 기록한다.

윤원의 아들은 수적으로 진사이며 순원은 양자하였는데 수관이고 진원의 아들로 유하·종하·술이며 조원의 아들로 조는 진사 또 막이 있고 사원의 아들로 선·적·일이 있으며 상원의 아들로 수간은 문과로 중시에 합격 교리가 되었고, 또 수조가 있으며 찬원의 아들 수경은 참봉이고 또 수윤이 있고 익원이 양자하였는데 수조는 진사이며 달원의 아들로 수헌·수관이 있고 수원의 아들 수약이고 만원의 아들은 수항·수익이며 성원은 양자하였는데 수성이다. 명원의 아들로 수겸·수성·수양·수하가 있다.

현손 통정대부 행 원주목사 지제교 방은 삼가 쓴다.
  
숭정 기원후 80년 정해년(1707) 10월 일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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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열 신도비(任說神道碑) 이식(李植)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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